지상과 지하로 나눠진 세계 / 네임버스




정국은 지하도시에서 자람. 사실 정국이 지하도시에 태어난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 다만 저를 키워준 화장터 주인이 '너는 바깥으로 가야한다' 는 말을 늘 달고 살아서 저기 지상의 어딘가가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일 뿐. 하얀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정국이를 보며 지하도시 사람들조차 정국이는 지상에서 온 우성인자임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함. 하지만 정국이는 지하도시의 여자들에게 안겨 물에 적신 메마른 빵을 뜯어 먹던 게 최초의 기억일 정도로 이미 몸과 마음은 지하도시의 아이임.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시는 늘 어둡고 음울하며 거리는 각종 범죄와 약탈,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음. 그런 거리에서 자란 정국이를 비롯한 지하도시 아이들의 생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건 예삿일이었는데 정국이는 12살 때 부터 지하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시신 정리하는 일을 함. 화장터 주인이 부모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길에 시체를 치우지 않고 방치하면 지하도시에 역병이 도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에 화장터엔 늘 불씨가 마를 날이 없었음. 지하도시 사람들은 그런 정국이를 어린 사마(死魔)라고 부르며 경외함. 



정국이 손목에는 [지민] 이라는 글씨가 박혀 있었는데 글을 배우지 못한 정국이는 이게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 없었음. 다만 손목에 새겨진 글자가 해가 지날수록 옅어진다는 걸 느끼다가 정국이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급격하게 옅어진 글자에 화장터 주인에게 손목을 보여주며 '이게 사라지려고 해요' 하자 화장터 주인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염. '스무 살이 넘기 전에 이 글자의 주인을 찾아야 된다. 손목에 새겨진 글자는 [지민]이다. 이름의 주인이자 너의 전부이기도 하다' 하며 도대체 알 수 없는 말을 함.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인상만 쓰고 있는데 낡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낸 화장터 주인이 정국이에게 작은 상자를 던져 줌. 상자 안에 있던 건 정국이가 지하도시에 왔을 때 입고 있던 배냇저고리와 아기 둘이 누워있는 사진임. '네 부모가 곧 너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했으나 지금까지 오지 못했다. 아마 반역자로 낙인 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거다' 라고 하며 정국이가 알지 못했던 옛날 얘기를 풀기 시작함. '네 손목에 새겨진 글자가 사라지기 전에 이름의 주인을 찾아라. 글자가 사라지면 너도 죽게 될 거다' 하며 정국이를 바깥세계로 밀어내는 화장터 주인. 






'지민'



손목에 새겨진 글자를 처음으로 말해 봄. 왠지 손목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글자를 손가락으로 뻑뻑 문지르던 정국이 들고 있던 사진을 비닐봉지에 담아 가슴 안쪽 주머니에 쑤셔 넣음. 저 생기다 만 얼굴의 아기를 이제와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높은 신분으로 추정되니 무조건 성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화장터 주인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쉼. '살아서 언젠가 한 번은 나를 찾아와 다오' 하는 주인 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돎.



스무살이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먼저 받아들이게 된 정국이 황망한 눈을 들어 자신의 모든 유년 시절의 전부인 지하도시를 둘러 봄. 좋았던 기억도 행복했던 기억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정국이에겐 하나뿐인 요람이던 지하도시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가볍게 등을 돌림. 화장터 주인이 알려준 루트를 통해 바깥세계로 나가던 정국이 눈앞에 보이는 밝은 빛에 급격하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낌. 길고 긴 터널 끝에 보이는 한 줄기 빛이 저를 재촉하는 것만 같아서 서서히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발에 날개를 단 것처럼 뛰기 시작함. 지하도시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이 타들어갈 정도로 밝은 지상 빛에 잠깐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뱉던 정국이 문득 자신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를 느끼며 눈을 뜸. 눈앞에 있는 헌병단은 3명.



'신분을 대라. 외지인은 허가증이 있어야만 지나갈 수 있다. 무허가 또는 불응시 체포한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정국이 가슴 안쪽을 뒤적이는 척 하다가 단검을 빼내어 헌병단 3명의 급소를 숨통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찌르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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