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학생회 회의는 맨날 4교시가 끝난 후에 열리는 거냐고. 전교 부회장의 추천으로 얼떨결에 환경부장이 된 후로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밥타임을 놓치게 돼버렸다. 밥 먹고 회의하면 좀 좋냐고. 사람이 어? 탄수화물이 들어가야 뇌 활동이란 게 더 활발해지고 집중력도 높아지고 그런 건데. 괜히 간부들이 회의 때마다 병든 닭처럼 눈에 초점을 잃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고. 이게 다 회장이 민윤기라서 그런 거다. 인간의 삼대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삭제한 채로 태어났으니 남들이 배가 고파 쓰러지든 말든 관심이 없는 거라고! 김석진이나 김태형이 회장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먹는 걸로 서럽게는 안 할 인간들이니까.


오늘은 교내 분리수거함 정리정돈 방안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하필 내 담당이라서 평소 같았으면 동공에 힘을 풀고 매직아이 상태로 앉아 있다가 나오면 됐을 것을 그러지도 못했다. 아니 애들이 제대로 분리를 안 하고 쓰레기통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는 걸 나보고 어떻게 대책 방안을 내놓으라는 건지, 내가 무당 눈깔도 아니고 그 쓰레기통을 하나하나 다 스캔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새끼 손가락 살을 물어뜯으며 학생회장의 시퍼런 [민윤기] 명찰만 보고 있는데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전정국이 번쩍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구하길래 깜짝 놀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뭐요.' 하는 얼굴이라서 머쓱하다. 지금껏 간부 회의 이래 한 번도 의견 제시를 한 적이 없던 애가 처음으로 손을 들었는데 좀 볼 수도 있지. 로봇감성 민윤기도 놀라는 눈친데.



"그래. 환경부 차장. 말해봐."

"배 고픈데 밥 먹고 하면 안 됩니까?"





*



전정국의 발언으로 회의는 순식간에 파토가 났다. 용기 있는 자의 소신 발언을 지지하듯 김석진, 김태형, 정호석, 김남준이 차례로 "그래 배고픈데 우리 밥 좀 먹고 하자." 는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전정국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 민윤기쪽에선 안 보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가 이런 소신 발언을 할 줄 도 아는 애였구나. 내가 김태형 덕분에 환경부장을 맡았다면 전정국은 김남준 덕분에 환경부 차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 학생회의실로 모였을 때 맨 마지막에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얼굴을 잊지 못한다. 왜냐, 1 잘생겨서, 2 잘생김을 방해하는 차가움때문에,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겨서. 놈에게 엄치척을 해주는 지금 이 순간도 1~3을 아우르는 포스로 나를 보는데 눈을 뗄 수가 없다.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외로운 엄지를 전정국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눌러 내려줬다. 



"그만 좀 해요." 

"응. 알았어."

"밥 먹으러 가요".

"응응."





일찍 회의를 접고 내려왔지만 시간이 어중간했다. 오늘도 여유있게 밥 먹기는 글렀구나. 앞에서 덤벙거리며 식판을 빼던 김남준이 와장창하고 뭔가를 파괴하는 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서 뒤로 펄떡이며 물러나다가 전정국의 가슴과 등이 부딪혔다. 



"으엇, 미안 괜찮아?"

"네."



부딪히면서 뒤로 기울법도 한데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전정국이 내 앞으로 휙 지나간다. 바로 앞에서 식판과 수저를 챙기더니 다시 휙 돌아서 나에게 전달. 얼떨결에 주는 걸 받고 나서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이렇다할 말도 없이 제 것의 식판과 수저를 챙기고는 "가요." 한다. 어어. 가자가자. 마치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힐끗 뒤를 돌아보던 전정국이 성큼성큼 배식대로 걸어갔다. 



"이모, 많이 주세요. 우리 정국이도 많이 주세요."



내 반찬을 받으며 먼저 배식을 받고 있던 전정국의 식판도 참견하자 놈이 피식 웃는다. 





*



여유가 없었던 건 우리만이 아니었나 보다. 급식표에 적힌 '유부초밥'에 설레고 긴장되던 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식판 반찬 칸 한가운데 덩그러니 올려진 초라한 유부껍질과 밥덩이를 보며 이모님들의 월급을 더 올려드려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 다행이다. 회의실에서 나올 때 화장실에 들러서 손 씻고 왔었는데. 나의 탁월한 선택. 미래를 보는 눈. 예언적 행동. 멋있다. 유부껍질을 펼쳐서 숟가락으로 밥덩어리를 쏙 밀어 넣자 어설프지만 그럴듯한 유부초밥이 완성됐다. 유부초밥 2개를 최종적으로 만들어놓고 맞은편 식판을 보자 태초의 모습 그대로 올려진 밥덩어리가 싸늘하게 식어있다. 



"이렇게 만들어 먹는 거야."



내가 만들어 놓은 유부초밥을 젓가락으로 들어서 전정국 눈앞에 갖다 대자 숟가락으로 국을 뜨다가 흠칫하고 뒤로 물러난다.



"너가 만들어 먹기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내 거 줄게."



유부초밥이 생각보다 미끄러워서 젓가락을 바들바들 떨며 전정국의 식판 빈 귀퉁이를 찾는데 다급하게 젓가락으로 내 젓가락과 유부초밥을 통째로 콱 집은 놈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한 입에 초밥을 털어넣었다. 덕분에 내 젓가락도 전정국의 입속에 조금 빨려 들어갔다가 나왔다. 갸름하던 얼굴이 볼록해져서 열심히도 초밥을 씹는데 좀 귀엽구.



"국물 위에 떨어트리면 어쩔 뻔했어요."

"안 떨어트렸잖아."

"그럴 뻔했다구요. 젓가락은 왜 떨어요? 사람 불안하게."

"아닌데..."

"이것도 줄 거예요?"



내 식판에 남아있는 유부초밥 한 개를 가리키며 전정국이 엄격한 얼굴로 물어본다.



"줄까?"

"아니요. 형 먹으라고요. 나도 만들 줄 알아요. 귀찮아서 그냥 놔둔 거예요."

"숟가락으로 쏙 넣어서 먹어야 더 맛있는데."

"어떻게 먹던 똑같아요, 그 맛이나 그 맛이나."

"기분이 다르잖아."

"똑같아요."

"응."



남은 유부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전정국처럼 한 입에 넣다가 급하게 손가락으로 못 들어간 부분을 구겨 넣었다. 으음 밥을 너무 많이 넣었나? 입안이 꽉 차서 입술을 잡고 밥을 씹는데 전정국이랑 눈이 마주쳤다.



"맛있어요?"

"......"

"내 거도 형이 만들어 먹어요. 숟가락으로 쏙 넣어서. 알았으니까 고개는 좀 그만 끄덕이고요."



유부초밥은 정말 맛있었다. 고마워 정국아. 잘 먹을게. 먹고 싶으면 말해. 나눠 먹자. 열심히 초밥을 씹으며 눈으로 말을 했다. 날 계속 보고 있는데 알아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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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보고 국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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