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꼬박 채운 프로젝트의 마지막 밤이다. 모래가 낀 뜻 까끌까끌한 눈을 비비려다 기름때 투성이인 손가락을 깨닫고 손목 어디쯤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출격 대기 중인 '드림'이가 새삼스럽다. 내 손으로 만든 첫 번째 차. 나와 동아리 사람들의 꿈. 마무리 정리를 한다는 핑계로 동아리 사람들을 억지로 돌려보내고 나니 시끌시끌하던 작업실에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랜만이다. 작업실이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구나. 이틀 뒤면 이 녀석이 트랙을 달리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손으로 문지르며 작업실 불을 껐다.
작업실 문을 잠그는데 그제야 피곤이 온몸을 덮쳐왔다. 삼 일 동안 야작을 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밤새 시원해진 공기를 느끼며 건물 바깥으로 나오는데 계단 앞에 서있는 박지민... 박지민?
그렇다.
박지민이다.
눈앞에 박지민이 실감 나지 않아서 잠깐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이 몇 시더라? 핸드폰을 키자 액정이 새벽 3시 20분을 알리고 있다. 지민아 지금 거기서 뭐 해? 여전히 까끌한 두 눈을 억지로 깜빡이며 박지민을 실체를 확인하는데 그런 나를 보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를 다독이는 박지민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가슴이 뻐근해져왔다.
"거기서 뭐 해?"
"너 기다리고 있었잖아 멍청아."
"전화를 하지."
"서프라이즈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말거라."
"많이 기다렸어?"
"아니 조금."
"얼마큼 조금?"
"진짜 조금. 5분만 더 뭉그적댔으면 전화로 화내려고 했는데. 암튼 운도 좋아요."
난데없이 전화로 혼날 상상을 하다가 다시 꿈꾸는 것 같은 얼굴로 박지민을 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나도 야작 하다가 잠 깨려고 나왔거든. 너무 감동받지 마."
"아 과제 들어간다던 그거? 어쩐지..."
잔뜩 눌린 박지민의 머리카락을 보다가 웃음이 났다. 사랑스러운 박지민. '웃음이 날 만큼 추하냐?' '누가 그렇데?' '응.' '누가?' '있어. 동방에서 같이 야작하는 애.' 걘 눈이 삐었나 보다. 물론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박지민은 귀엽기 때문에 너무 띄워주면 병아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정국이 많이 피곤하겠다. 드림이는 잘 있고?"
작업실을 완전히 벗어나 공대 캠퍼스를 걸었다. 드림이의 안부를 확인하는 말끝이 하품으로 흩어진다. 자기도 피곤하면서 미대에서 공대까지 잘도 찾아왔다. 작업실로 오는 길은 상당히 험난하다. 보도블록이 들려서 부비트랩처럼 심어져 있기도 하고 각종 작업 쓰레기들이 길가에 늘어져 있기도 하다. 이 위험한 길을 쫑쫑거리며 왔을 거 아니야. 심지어 가로등도 3개나 고장나 있는데! 마침 머리 위로 고장난 가로등을 힘차게 노려보다가 지뢰처럼 들려진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한 걸 힘으로 버텼더니 엄지발가락이 터질 것 같다. 안 돼. 꽃길만 걸어도 부족한 박지민을 이런 불량함으로 가득 찬 공대 길을 걷게 할 순 없어.
"지민아."
"형이다. 정국아."
"아 맞다, 형."
"오냐."
"내가 갈 테니까 오지 마."
태초에 말을 길게 포장해서 못하는 나다. 박지민이 내 마지막 말을 해석을 하느라 우리 사이에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전정국."
오. 좀 심각한 목소리. 병아리가 심각해 봤자지만.
"응"
"내가 쪽팔리냐?"
"응??"
"내가 머리도 안 감고 꾸질하게 찾아와서 그래?"
박지민의 번역기에 오류가 발생했다. 큰일인데. 서프라이즈니 뭐니 하며 위풍당당하게 서있을 땐 언제고 이제와서 가당치도 않은 결과 도출에 소리 나게 웃었더니 입이 이만큼 튀어나온다.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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