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누가 날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건 초등학교 다닐 때가 유일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전정국이 생각나는 건, 저기 길 건너 신호등 앞에 서 있는 거센 존재감이 전정국일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버스 타지 말라고 난리치던 전정국에게 미안하게도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시선집중을 받고 있는 놈을 한참 동안 멀거니 쳐다보았다. 정말 잘났다, 여유 있게 놈의 어깨를 감싸는 하얀 반팔 티라든지, 자유분방해 보이는 백팩, 커다란 우산과 그 안에 자리 잡은 동글한 머리통이. 바닥에 튀기는 물방울이 반짝이며 그의 발걸음을 따라다녔다.



"정국아."


혼잣말처럼 녀석의 이름을 불러봤다. 내 목소리가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전정국은 망설임 없는 반듯한 걸음으로 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뭐야.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잘 생겨가지고.

아. 버스 언제 오지.

우산 없는데 집 앞에 내리면 바로 뛸까?



수업 마칠 때 종종 나를 기다리는 전정국은 우리 과에서 알게 모르게 유명했다. 전정국 번호 좀 알려달라고 옆구리를 찌르는 애들이 몇 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 기다리는 날엔 늘 문자나 전화로 기다린다고 연락을 먼저 하는 놈인데. 핸드폰 화면을 아무리 굴려 봐도 전정국의 'ㅈ'도 찾을 수 없다. 뭐야. 진짜 누구 만나러 가는 거지? 어제 점심 먹을 때까지 내 앞에서 나대던 김혜선이 떠오른다. 



-전정국 낯가려서 니 번호 11자리 뜨는 순간 차단할 걸?

-숫자한테도 낯가리냐? 0과 1로 이루어진 사이버 인간이세요?

-야 씨! 아무튼 그렇다고!


전정국의 낯가림은 신의 한수이자 내 알량한 자존심에겐 최고 방어막이다.





[형 어디에요]

"어? 나 지금 버스정류장. 학교 앞에."

[형 내 말 뭘로 들었어요? 코로 들었나? 그 작은 코로?]

"뭐어?"


1301번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전정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딱딱한 목소리가 성질을 부린다.



[버스 말고 택시 타라고 했잖아요]

"야. 택시비는 땅 파면 나오냐? 나 한 달 용돈 쪼개고 쪼개서 쓰는 상그지 대학생이야. 누구랑 다르다고. 내가 왜 이런 걸로 너랑 입씨름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지극히 평범하,"

[우산은 있어요?]



지 필요한 말만 듣고! 꺠썌끼야!



"...우산 없어. 아까 정문 나올 때 친구 우산에 끼여서 겨우 왔는데 가방 다 젖었어."

[그러게 과방에 가만히 있지 뭐 하러 부지런을 떨어요. 오늘 같은 날]

"우산 얻어 쓰려고 그랬지! 다들 빨리 간다고 그러는데."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을 줄 알았더니]

"나도 놀랐어. 나의 재빠름에."

[비 많이 맞았어요?]

"조금. 추워."

[추워요? 아 진짜]


찡얼거리는 내 말에 딱딱하게 모나있던 말투가 누그러든다. 걷고 있는 중인가? 이동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 오는 날 몰래 마중 나온 컨셉이었는데. 망했네요. 형 눈치 좀 더 키워요.]


그러니까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만나러 온 게 맞았다. 아 전정국. 격렬한 감정이 가슴을 때려서 잠깐 눈앞이 핑 돌았다. 



"내가 무당도 아니고... 과방에 앉아서 쌀 뿌려놓고 오늘의 컨셉 점이라도 볼까?"

[쌀 뿌릴 것까지야. 아무튼 어떡할 거예요.]

"뭘 어떡해..."

[과 사람들이 나 이상하게 보던데요? 쟤는 뭔데 자꾸 여기 와? 이런 눈으로]



낯가리는 놈이 정색하고 과방문을 열었다가 내가 없는 걸 깨닫고 되닫는 모습이 상상됐다. 조곤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붙잡고 있는데 멀리서 1301번 버스가 오는 게 보인다. 아무짝에 도움도 안 되는 1301.



[버스 오는 건 왜 보는데요. 그거 타고 가려고?]



폰을 내리고 젖은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주위를 둘러봤다. 정문 시계탑 앞을 지나쳐 오고 있는 전정국이 보인다. 커다란 우산을 들고. 백 미터 밖인데도 너무 전정국이다. 



"나 보여? 한눈에 알아봤어?"



맥락 없이 뱉는 말에 전정국이 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난 형이 포대자루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알아본다니까]



점점 가까워지는 존재감이 마침내 눈앞에 당도했을 때, 촤락- 우산을 기울여 무겁게 맺혀있던 빗방울을 떨쳐내고, 우산 안에 내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 나를 잡는 손길에 이끌려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불시에 가까워진 얼굴이 입술을 스치고 떨어졌다. 



"내 말 코로 들을 때마다 추가하려고 하는데, 형 생각은 어때요?"



아마도 벌겋게 타오르고 있을 얼굴을 숨기며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미친!

내 심장 무사한가?!




-


그 느낌적인 느낌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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