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보드에 다소 충격적인 초상화를 그린 이후로도 박지민은 그림 그리기에 대한 열정을 쉬이 놓지 못 했다. 얼마나 오래가려고 그러는가 싶어서 별말없이 지켜만 봤는데 꽤 취미를 들인 것 같긴 했다. 결과물을 잘 안 보여줘서 수준 파악을 할 순 없지만 말이다. 


중간고사를 끝내고 나서 할 일이 없는지 작업실로 찾아와 빈둥거리던 박지민이 허락도 없이 내 라커를 열어젖혔다. 아 비밀번호 괜히 알려 줬네. 전에 비밀번호가 왜 901이냐고 따져 묻는 박지민에게 세 자리 밖에 설정이 안돼서 1013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니 눈을 접으며 웃었었다. 나도 9월에 태어날 걸-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라커 안에 들어갈 기세로 뭔가를 뒤적이던 박지민이 제일 구석에 깔려있던 안 쓰는 드로잉북을 꺼냈다. 



"정국아 나 이거 써도 돼?"



기대에 찬 얼굴을 보며 안 돼요라고 하고 싶어졌다. 그냥 박지민의 얼굴을 보면 심술이 생긴다.



"네. 써요."



생각이 그렇다는 거고. 허락을 해주니까 좋다며 입을 벌리고 웃는데 역시 생각은 생각으로 끝내야 되는 건가 싶다.



"뭐 해요?"

"아 안 돼. 보지 마. 아직."



뭐만 그렸다 하면 일단은 숨기고 보는 박지민이 얄미워서 관심을 끄고 내 작업에 집중했다.



"정국아."



저렇게 금방 부를 거면서 뭘 자꾸 숨기고 그런대.



"자 선물이야."

"이게 뭐예요?"

"너."

"이게 어딜 봐서 저예요?"

"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모습이잖아. 막 근육이 빵빵해서."



무슨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을 괜히 한 번 둘러 보고는 얼른 드로잉북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아 왜. 나 써도 된다며."

"안 돼요."

"야 씨.. 치사하게 줬다 뺐냐."



툭 튀어나온 입술이 실망으로 삐죽인다.



"형 진짜 그림 못 그리네요. 미술 하지 말라니까."

"...씨! 야! 내가 그렸던 거 다시 내놔."

"안 돼요."

"뭐 왜 안 돼! 자꾸 안 된대. 짜증 나. 내 그림이잖아!"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지. 이런 바보 같은 그림은 누가 보면 창피하니까 일단 집에 가지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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